Notion 태그가 50개인 이유
- 03 Dec, 2025
Notion 태그가 50개인 이유
시작은 순수했다
작년 3월이었다. 팀장이 말했다. “콘기획님, 콘텐츠 성과 분석 좀 체계적으로 해봐요.”
좋았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왜 어떤 콘텐츠는 터지고 어떤 건 안 터지는지. 데이터로 정리하면 패턴이 보일 거라고 믿었다.
Notion 데이터베이스 만들었다. 처음엔 태그 5개였다. ‘바이럴 성공’, ‘바이럴 실패’, ‘평범’, ‘실험’, ‘보류’.
깔끔했다. 단순했다. 일주일 유지됐다.

태그는 증식한다
문제는 ‘바이럴 실패’였다.
왜 실패했는지가 중요한데. 그냥 ‘실패’로만 분류하면 의미가 없었다.
태그를 나눴다. ‘후킹 약함’, ‘타겟층 미스’, ‘편집 아쉬움’, ‘타이밍 안 맞음’.
일리 있었다. 구체적이었다.
그런데 ‘후킹 약함’도 세분화가 필요했다. ‘썸네일 문제’, ‘제목 문제’, ‘첫 3초 문제’.
‘타겟층 미스’도 마찬가지. ‘20대 노린 거 30대가 봄’, ‘남성 타겟인데 여성 유입’, ‘MZ 아닌 4050 반응’.
한 달 뒤 태그가 20개였다.
“좀 많은데?” 동료가 물었다. “정확해야 하잖아.” 내가 답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환상
6월쯤. 태그가 35개였다.
‘알고리즘 변화 의심’, ‘경쟁 콘텐츠 많음’, ‘시즌 이슈 종료’, ‘크리에이터 컨디션 나쁨’, ‘촬영 당일 날씨 흐림’.
마지막 건 농담 아니다. 실제로 만들었다.
날씨 흐린 날 찍은 콘텐츠가 조회수 낮다는 가설. 3개 데이터 있었다. 패턴이라고 믿었다.
회의 때 발표했다. “날씨가 콘텐츠 퀄리티에 영향을 줘요.”
팀장이 웃었다. “콘기획님 요즘 너무 피곤한 거 아니에요?”
피곤하긴 했다. 매일 밤 11시까지 Notion 정리했다.
오늘 올린 콘텐츠 3개. 각각 태그 10개씩 달았다. ‘바이럴 가능성 중’, ‘후킹 보통’, ‘편집 깔끔’, ‘타겟층 정확’, ‘업로드 타이밍 최적’, ‘썸네일 클릭률 예상 4%’, ‘예상 조회수 5만’.
다음 날 결과 나왔다. 조회수 800.
태그 추가했다. ‘예측 완전히 빗나감’.

50개 달성의 순간
9월. 태그 50개 돌파했다.
기념해야 하나 싶었다. 웃겼다. 슬펐다.
최근 추가된 태그들: ‘분석 포기’, ‘감으로 올림’, ‘이유 모름’, ‘그냥 올려봄’, ‘태그 달기 귀찮음’.
아이러니했다. 태그를 정리하려고 만든 태그가 정리를 포기한다는 내용.
동료가 내 Notion 봤다. “와 미쳤다. 이거 실제로 쓰는 거예요?”
“응.” 대답했다. “근데 요즘 안 써.”
진짜였다. 9월 들어서 콘텐츠 5개 올렸는데. 태그 하나도 안 달았다.
달 의미를 모르겠었다.
‘바이럴 실패 - 후킹 약함 - 썸네일 문제 - 클릭률 2% - 예상 3% - 타겟층 20대 여성 - 실제 유입 30대 남성’
이렇게 달아도. 다음 콘텐츠는 또 실패했다.
데이터가 답을 안 줬다. 패턴이 안 보였다.
아니, 보였다. ‘모든 콘텐츠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패턴.
왜 50개까지 갔을까
주말에 카페 앉아서 생각했다.
태그 50개 만든 이유. 통제하고 싶었던 거다.
콘텐츠가 왜 터지는지 모르는 게 무서웠다. ‘운’이라고 인정하기 싫었다.
‘후킹이 약해서’, ‘타이밍이 안 맞아서’, ‘알고리즘이 안 밀어줘서’. 이유가 있으면 대응할 수 있다. 다음엔 고치면 된다.
근데 진짜 이유는 뭘까.
어제 올린 콘텐츠. 조회수 50만. 왜 터졌는지 모른다.
썸네일? 평범했다. 후킹? 딱 3초, 다른 것들이랑 비슷했다. 타이밍? 금요일 오후 6시, 늘 하던 시간.
댓글 봤다. “ㅋㅋㅋㅋ이게 왜 웃기지” “알고리즘이 이걸 왜 띄워줘” “아 근데 또 보게 됨”
이유 없었다. 그냥 터졌다.
태그 달 수가 없었다. ‘운 좋음’? 우습다. ‘이유 모름’? 이미 있다.
결국 아무것도 안 달았다.
태그 대신 남은 것
10월. Notion 데이터베이스 열었다.
태그 50개 다 지웠다.
새로 만들었다. 딱 3개.
‘재밌었음’, ‘재미없었음’, ‘모르겠음’.
주관적이다. 데이터 아니다.
근데 이게 맞는 것 같았다.
콘텐츠는 과학이 아니다. 패턴 있는 것 같은데 없다. 없는 것 같은데 또 있다.
‘후킹이 약하면 안 터진다’는 규칙. 예외가 5개 있으면 규칙이 아니다.
‘타겟층 정확하면 성공한다’는 가설. 타겟층 정확한데 망한 거 10개 있다.
결국 감이다. 데이터 보면서 키우는 감. 근데 데이터에 갇히면 감이 죽는다.
요즘은 그냥 올린다. 재밌으면 올린다. 안 터져도 괜찮다.
어차피 다음 콘텐츠 기획해야 한다. 이번 거 왜 안 터졌는지 분석하는 시간에. 다음 거 하나 더 만드는 게 낫다.
번아웃의 신호였다
돌아보면 태그 50개는 번아웃 신호였다.
‘컨트롤해야 해’, ‘이유를 알아야 해’, ‘패턴을 찾아야 해’.
강박이었다.
콘텐츠 기획자는 크리에이터다. 데이터 분석가가 아니다.
물론 데이터 봐야 한다. 조회수, 클릭률, 체류 시간, 이탈 구간. 다 중요하다.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왜 사람들이 이걸 재밌어할까’를 고민해야지. ‘왜 이 콘텐츠가 3.2% 클릭률이 나왔을까’에 매달리면 안 된다.
3.2%와 3.8%의 차이. 알고리즘 변동일 수도 있다. 그날 경쟁 콘텐츠가 강했을 수도 있다. 그냥 재수 없었을 수도 있다.
모른다. 모르는 게 정상이다.
태그 50개 만들면서 깨달았다. ‘나 지금 일 하는 게 아니라 일 흉내 내고 있구나’.
지금은
Notion 태그 3개로 산다.
‘재밌었음’ 태그 달린 콘텐츠. 조회수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다. 패턴 없다.
근데 다시 보면 웃긴다. 내가 재밌어한 콘텐츠는 나중에 봐도 재밌다.
‘재미없었음’ 태그. 조회수 높은 거 하나 있다. 50만 넘게 나왔다.
근데 나는 재미없었다. 타겟층 의식하느라 내 취향 죽였다. 성공했지만 자랑스럽지 않다.
‘모르겠음’ 태그. 제일 많다.
솔직하다. 모르겠는데 올린 거. 올려봐야 아는 거.
회의 때 팀장이 물었다. “요즘 Notion 관리 안 하시죠?”
“네. 태그 다 지웠어요.”
“왜요?”
“의미 없더라고요.”
팀장이 웃었다. “그래도 되나?”
“어차피 패턴 없잖아요. 콘텐츠는.”
“맞네.”
대화 끝났다.
나중에 슬랙으로 메시지 왔다. “저도 예전에 그랬어요. 태그 100개 만들었었죠. 다 소용없더라고요.”
100개. 나보다 심했다.
웃겼다. 모두가 지나가는 길인가 보다.
태그 50개 시절, 나는 답을 찾으려 했다. 지금은 안다. 콘텐츠에 정답은 없다. 있는 건 다음 콘텐츠뿐이다.
